12. 새벽에 추워서 깼다. 바닥에는 늘 안고 자는 분홍 토끼인형이 떨어져 있었고 열린 창문 틈으로 찬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창문도 안 닫고 잤네. 지훈은 뻗친 머리를 누르며 꾸역꾸역 일어났다. 입술이 댓발 나온 채로 한숨을 쉬었다. 다니엘과 심야 영화를 보느라 새벽 늦게 집에 들어온 지훈은 피곤에 절어있는 상태였다. 머리맡에 둔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
11. 지훈에게 연애경험이 많냐고 묻는다면, 허세 가득한 지훈은 수줍게, 그러나 눈은 당당하게 뜨고 말했다. 응, 많지. 그러면 사람들은 표정으로 말한다. ‘역시, 박지훈.’ 지훈은 사람들의 그런 반응이 좋았다. 그리고, 뭐, 실제로 연애 경험은 많았으니까. 그런데 평범한 연애가 아니었다는 게 찝찝하지만. 불건전한 연애는 아니었다. 인터넷에서 게임하다가 만...
10. 너였구나 이 길 처음부터 나를 따라오던 것이 서리 묻은 나뭇가지를 흔들어 까마귀처럼 놀라게 하는 것이 너였구나 나는 그냥 지나가려 했었다 서둘러 말을 이 겨울숲과 작별하려 했었다 그런데 그만 너에게 들키고 말았구나 슬픔, 너였구나 -류시화/ 슬픔에게 안부를 묻다 中 * 오필리아가 햄릿의 고뇌를 알고 있었더라면,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셰익스피어의...
9. 관(棺)이 내렸다. 깊은 가슴 안에 밧줄로 달아내리듯 주여 용납하옵소서 머리맡에 성경을 얹어주고 나는 옷자락에 흙을 받아 좌르르 하직했다. 그 후로 그를 꿈에서 만났다. 턱이 긴 얼굴이 나를 돌아보고 형(兄) 님! 불렸다. 오오냐 나는 전신으로 대답했다. 그래도 그는 못 들었으리라 이제 네 음성을 나만 듣는 여기는 눈과 비가 오는 세상. 너는 어디로 ...
8. 어젯밤 처음 난 꿈을 꾸었네 누군가 날 안아주는 꿈 포근한 가슴에 얼굴을 묻고 웃었네 나 그 꿈속에 살 순 없었나 -뮤지컬 프랑켄슈타인 中 어머니는 교사셨다. 피 끓는 20대 중반을 도심 속 한 학교에서 보내면서 깨달은 점은, 남보다 앞 서 나가기 위해 비겁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했다. 학생들과 푸르른 꿈을 꾸는 것을 최고의 이상으로 삼을 신규...
7. 눈에 담지 않으면 마음도 멀어지겠지, 곧 바쁜 일상에 밀려날 아이겠지, 하며 자신을 다독였다. 부끄러워하는 두 뺨과 동그란 정수리가 참 예쁜 아이지만, 강아지처럼 자꾸 꼬리를 흔들며 저를 봐달라고 눈짓하는 다정한 아이지만, 마음의 벽을 쌓다보면, 저가 먼저 거리를 두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너를 보지 않으려 애쓰는데, 부러지지 않으려고 ...
* 글 속 인물은 가공된 캐릭터입니다:) 예기치 못한 비가 오는 날이면, 으레 인상을 푹 쓰고 고개를 무릎 사이로 쳐 박고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 그것이 나의 사소하지만 가족들을 귀찮게 하는 습관이다. 대장부같이 화끈한 어머니께서는 조용히 감상에 젖은 나의 모습이 남자답지 않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이었다. 나를 보며 혀끝을 끌끌 차시는 것을 보아하니. 그...
6. 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 한평생 그대를 잊을 수 없소이다 내 차례에 못 올 사랑인 줄은 알면서도 나 혼자는 꾸준히 생각하리라 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 이상, <이런 시(時)> “진짜 미안해.” “아니야, 괜찮다니까 왜 그래.” “그래도, 너무 미안해서.” 소연이 지훈의 빈 잔을 채워주었다. 이미 눈이 반 쯤 풀린 상태였지만 점...
5. 봄을 닮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래서 여름이 오면 잊을줄 알았는데 또 이렇게 생각이 나는걸 보면 너는 여름이었나 이러다 네가 가을도 닮아있을까 겁나 하얀 겨울에도 니가 있을까 두려워 다시 봄이 오면 너는 또 봄일까 /백희다, 너는 또 봄일까 “야, 지훈이 인기 많은 거 봐.” 성우가 다니엘에게 여대생 무리를 눈짓으로 가리킨다. 쟤네, 계속 지훈이 보는...
4. 지훈이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알람소리 없이 스스로 일어난 것은 오랜만이었다. 분명 어제 다니엘과 술을 마셨고, 술의 힘을 빌려 용기 있게 호감을 표시했건만, 보기좋게 차였었지. 수치심과 서러움으로 이불을 거나하게 차고 있는데 지훈의 어머니가 부엌에서 지훈을 부른다. 깼으면 나온나. 주말이었기에 망정이지, 곧 바로 학교에 가 다니엘을 우연히라도 ...
3. 지훈은 어릴 때부터 촉이 좋은 편이었다. 중학교 때, 반 평균이 내려가면 단체 기합을 주는 담임 선생님이 계셨다. 1학기 중간고사 때보다 4점이나 낮아진 반 평균을 보시고 우리들의 미래와 대한민국의 미래까지 걱정하시며 매를 드셨다. 종아리와 발바닥이 퉁퉁 부어올랐고 담임 선생님께 종아리를 걷으며 수치스러워하는 남자애들도 있었다. 지훈은 맷집이 좋은 편...
2. 지훈은 그 날 꿈을 꾸었다. 절벽을 오르는 꿈이었다. 자신이 왜 이 암벽을 올라야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지만, 꿈이니까 그러려니 했다. 얼른 올라가서 쉬어야지. 끊어질 것 같이 얇은 밧줄을 붙잡고 다리로 온몸을 지탱하는데, 잠시 땀을 닦으러 한쪽 손으로 이마를 훔친 순간, 균형을 그대로 잃고 끝없이 떨어지고 말았다. 이대로 죽는구나, 싶었던 지훈은 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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